누군가의 메모장

찻잎으로 시작된 생각의 흐름

엽저는 차를 우려내고 난 후의 찻잎이에요.png

이렇게나 온전한 찻잎이라니 신기하고 재밌다. 부서진 곳이 덜한 채로 수분을 잔뜩 머금어 원래의 크기를 되찾는 찻잎이 멋있기도 하고 내가 뭐라고 그리고 얘가 뭐라고 대견하기까지 하다. 퉁퉁 불은 엽저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생각했으니 별 희한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주 이상한 건 아니다. 다시 다이어리를 쓰고 일기를 쓴다. 차도 마신다. 언제나 평가대 위로 서는 듯했던 명절도 무사히 지나갔다. 무사히 정도가 아니다. 모두가 조금이나마 변했고 무엇보다 내가 변했다. 추석에 부모님을 뵈러 다녀오면 빠른 시일내로 병원에 들르라 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다. 살이 쪄버려서 결국 제주도에서 일주일이나 머물렀는데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나는 모든 걸 놓아버린 채로 1년을 살았다. 고작 일주일 동안이라도 살을 빼고 예뻐진 모습으로 할머니집을 가자는 엄마의 말에 작게나마 안심하면서 크게 불안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결국 엄마의 일정으로 인해 할머니를 보러 가지 못한 나는 엄마도, 아빠도 나를 감추고 싶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격지심으로 만들어 낸 결론인지 아님 정말 엄마 아빠의 마음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모든 건 과거가 됐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많이 약해졌고 아무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지만 모두가 안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그러니 나도, 그 누구도 쉽게 얘기하지 않는다. 죽음의 문턱을 간신히 넘은 오빠의 생명이 많은 걸 바꿔놨다. 삶은 정말 단순하고 덧없다. 태어남이 있으니 죽음이 있고, 죽음을 생각하면 단순하지 않을 것이 없다. 잘 살아내고 싶어질수록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일주일마다 체크해야 했던 '최근 일주일간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그렇다'라고 표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죽음은 그때의 죽음과는 다르다. 응급실 앞에서 몇 번이고 마주해야 했던 죽음과도 다르다. 주어가 무엇이 되든, 내일 당장 죽는다면 어떨 것 같아? 라는 질문에 언제나 미련이 가득한 대답을 내리며 언제 죽어도 괜찮을 만큼 살아내고 싶다.

이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라고 말한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중요하지 않다 했으면서 기어코 이번에도 내가 입을 옷을 확인한 엄마지만, 그래서 나도 조금은 휘청거렸던 요즘이었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다는 걸 안다. 많이 변했지.

처음 걸려 본 코로나는 상당히 아프다. 난방을 몇 시간을 틀어도, 온수매트를 가장 뜨겁게 설정해도 계속 추웠다. 병원에 갈 힘이 없어 주저앉아 울었다. 목에서는 아직 피 맛이 나고 기침은 심해지는데 춥지 않고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 이만하면 괜찮은 게 아닐까. 또다시 이 깨달음을 수없이 잊어버리겠지만 뭐 다시 깨달으면 된다. 이만 궁시렁거리고 자야겠다. 다시 또 조금 아파오는 것 같다. 2024.2.13